뉴턴
https://youtu.be/RIFTtX1Us-0?feature=shared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이미 아버지를 여의고 태어난 뉴턴은 몸집이 작은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3살이 되던 해 재혼을 하면서 외가에 맡겨지고 만다.
뉴턴이 쓴 "19살까지의 죄 목록"에 양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적어 놓았다. 뉴턴의 어머니는 아이를 3명 더 낳았고,
8년 후 양아버지가 죽자 돌아왔다.
아버지 쪽 친적들이 마을 학교에서 괜찮은 성적을 내는 뉴턴을 후원 해줘서
1655년 그랜섬 공립 중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사물이나 독서의 내용을 수시고 메모하였고 약초 수집을 즐겨 했으며 실험을 통해 증명하려고 하는 행동을 했다.
기계를 좋아하여 물레방아의 모형이나 해시계, 물시계 등도 제작하였다.
친어머니의 반대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를 짓기도 했던
뉴턴은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에 입학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기계를 만지기를 좋아했던 소년에 불과했지만, 2번의 일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첫번째는 어머니로부터 지원을 잘 받지 못해 잡일을 하면서 배워야했던 서브시디어리(Subsidiary)였던 뉴턴을
정식 스칼라(Scholar)로 만들고 여러가지 혜택을 베풀어준 수학교수 아이작 배로(Isaac Barrow)와의 만남이었다.
두번째는 1665~1667년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휴학을 하고 고향 울즈소프로 2년간 피신했던 기간이었다.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시기의 일이다.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문을 열자 돌아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그해에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 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때 뉴턴이 기여들이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1672년 캄캄한 방 안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무지개 색과 똑같았다.
이렇게 갈라진 전체색의 빛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다시 백색광으로 변했다.
또,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의 빛은 가각 굴절 정도가 다르며 고유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과 엇갈린 주장인 "빛의 입자설"을 발표하였는데
두 사람의 논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더 많은 지식 이야기로 채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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